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주성 전투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[고려]] [[여몽전쟁#s-2|몽골의 1차 침입 당시]] [[제1차 자모산성 전투]], [[동선역 전투]] 등과 더불어 가장 치열했던 [[전투]] 중 하나. 가장 극적이고 기록도 많이 남아 있는 전투다. 1231년 8월, [[저고여 피살 사건]]을 빌미로 [[여몽전쟁|고려에 대한 몽골의 침입]]이 시작되었다. 당시 몽골은 금나라 침공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고, 명목상 [[금나라]]의 신하국인 고려가 자신들의 후방을 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조치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. 당연히 고려에게 "야 너 금나라 돕지마!"라고 하면 들어줄리가 만무하니 소수의 병력을 보내 협박을 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몽골의 주력도 아닌 30,000명의 병력이 고려왕의 항복을 이끌어내는 예상치도 못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. 다만 [[토크멘터리 전쟁사]]에 따르면 이때 침공한 몽골의 병력이 주력군인지 아닌지는 현재도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대목이라고 한다. 총책임자인 권황제(점령지에 황제의 대리로 통치할 수있는 권한이 있는 직책) [[살리타이]]가 이끄는 30,000명의 군사가 [[압록강]]을 건너 내려왔다. 살리타이는 일단 함신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. 함신진은 성(成)이 아닌 진(陣). 즉 관문에서 싸웠으며 이는 지키기가 성보다 더욱 힘들게 자명했다. 이곳은 [[조충(고려)|조충]](趙沖)의 아들 [[조숙창]](趙叔昌)이 방수장군(防守將軍)으로 보직을 맡고 있었으며, 살리타이가 항복을 권하자 성안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저 요구를 받아 들여야 된다는 부사(副使) 전간(全間)의 건의에 따라 투항했다. 이 때문에 조숙창은 《[[고려사]]》에서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렸다. 이어 살리타이는 [[철주성 전투|철주에서도 승리를 거두고]] 정주를 함락시킨 후 부대 재편성을 실시한다. ||<^|1> [[파일:external/www.bbggnews.com/1_L_1347593397.jpg|height=300]] || [[파일:attachment/gangdongyukju1.jpg|width=400&height=300]] || ||본군 ||살리타이가 직접 이끄는 부대며 남로군의 진격로를 뒤따라 내려간다 || ||남로군 ||정주 → 선주 → 곽주를 거쳐 청천강을 도하해 북로군에 의해 퇴각하는 고려군을 말살하면서 개성으로 진출한다. || ||북로군 ||삭주 → 귀주 → 태주 → 위주를 점령해 고려군의 후방공격을 방지하며 청천강 연안에 머물며 고려군의 반격에 대비한다. || 본군, 남로군, 북로군으로 나뉘어 [[개성시|개성]]으로 진격하게 하였는데 본군과 남로군은 [[동선역 전투]]에서 고려의 중앙군에게 안주로 퇴각한 상황이었다. 문제는 우에르(오야이)가 이끄는 북로군이었는데 10,000명에 달하는 북로군은 당시 작은 성에서 지체하고 있었고 그 성이 바로 [[귀주성]]이었는데, [[귀주성]]은 강동 6주의 성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. || [[파일:external/cp.culturecontent.com/CP0208401421_f00001.gif|width=100%]] || || [[귀주성]] 전투 전황도. [[http://www.culturecontent.com/content/contentView.do?search_div=CP_THE&search_div_id=CP_THE009&cp_code=cp0208&index_id=cp02081611&content_id=cp020816110001&search_left_menu=|출처]][* 참고로 전황도에서 고려와 몽골의 공격로 표기색이 정 반대로 되어 있다.] 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